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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살림이야기

땅과 농부께 감사하며 삽니다

2020.01.0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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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월호 (628호) 소식지 내용입니다.

‘킨포크(Kinfolk)’라는 단어를 그대로 형상화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배우 문숙의 첫인상이 그랬다. 염색으로 가리지 않은 회색빛 머리칼을 단아하게 쪽져 올린 머리매무새, 쌀쌀한 날씨에도 동물의 가죽이나 털에 기대지 않는 소박하면서도 차분한 옷차림, 정결한 식습관과 오랜 몸수련으로 가볍고 곧은 몸의 자세, 기품 있는 얼굴 위에 간간이 비치며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개구진 미소까지. 굳이 말로 꾸미고 행동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음에도 삶을 대하는 태도가 온몸에서 그대로 읽히는, 문숙은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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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은 얼마 전 펴낸 에세이집 『위대한 일은 없다』에서 “사람들은 다들 사랑스런 삶의 과정은 빼고 원대한 결과에만 집착한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위대한 일이란 아무 데도 없다. 위대한 과정만 있을 뿐이다. 아주 작은 일들로 연결되어 있는 이 과정이 곧 삶이다”라고 전했다.
만난 지 수 분 만에 그 구절이 단박에 이해가 갔다. 마을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올라 오고, 종이컵에 내온 차를 보며 지구환경에 미안함을 느끼는 사람. 그는 일상의 작은 일들을 아주 정성스럽게 대하는 사람이었다.
갈무리한 빛을 건네는 사람으로

젊은 시절의 문숙은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배우였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3년, 동양방송 공채탤런트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고, 영화 <태양 닮은 소녀(1974)>로 한국연극영화예술상(현 백상예술대상) 신인상, <삼포가는 길(1975)>로 대종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했다. 급기야 당시 ‘충무로의 천재’라 불리던 이만희 감독과 결혼하며 완전한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태양처럼 눈부신 날만 이어질 것만 같던 그의 인생에도 가파른 변곡점이 찾아왔다. 병으로 남편을 떠나보내고 한동안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던 그는 스물두 살의 나이에 한국을 떠났다. 미국에서의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펼쳐졌다. 미국 곳곳을 다니며 그는 서양화를 비롯해 요가철학, 아유르베다, 요가 식이요법 등 몸과 정신을 살리는 수련법과 자연치유식, 마크로비오틱, 차도 등 먹을거리를 통한 치유법을 체득했다. 하와이 마우이섬에서 오랫동안 요가와 명상, 자연치유식을 가르치고 상담하며 『문숙의 자연식』과 『문숙의 자연치유』를 펴내기도 했다.

그가 한국에 돌아온 것은 5년 전. 이후 <뷰티인사이드>, <허스토리>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하며 배우로 활약하는 한편, 몸수련과 좋은 먹을거리를 통해 자기를 보듬고 그 방법을 전하는 삶에도 집중하고 있다. 한때 누구보다도 밝은 빛을 발산하던 그는 수십년 동안 그 빛을 안으로 갈무리하는 법을 배웠고, 이내 더 깊고 은은한 빛을 건네는 그런 사람으로 우리에게 말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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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과 농부에게 감사하는 삶으로

문숙은 많은 부분 한살림과 닮아 있다. 이를테면 작은 것을 행복하게 쌓아가다 보면 마침내 위대한 일을 이루게 된다는 그의 말에는 가치관과 생활양식의 변화를 도모하는 생활실천을 통해 사회의 문화체계와 가치체계를 변화시키려 했던 한살림의 초기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좋은 먹을거리의 소중함을 아는 것 또한 한살림과 같다.

『문숙의 자연식』에서 그는 좋은 먹을거리에 대해 원래의 모양과 향을 그대로 보존하고, 인공조미료나 인공 색소, GMO 등을 넣지 않으며 제초제나 화학비료를 주지 않고 유기농으로 기른, 제철에 자란 가까운 먹을거리라고 아홉 가지로 정리했다.

“3~7년이면 우리 몸의 모든 세포가 떨어져 나가고 새 세포가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그럼 우리는 계속 새로운 몸으로 변화하는 거잖아요. 새로운 몸이 어디서 오겠어요. 어제 무엇을 먹었고, 누구를 만나 어떤 말을 했는지가 오늘의 나를 결정하는 것 아니겠어요? 요즘은 사람들이 스트레스가 많아서인지 먹는 양이든, 맛이든 과하게 하는 데서 기쁨을 찾으려 하는 것 같아요. 먹을거리가 오락이 되다 보니 몸과 마음도 망가지죠.”

아홉 가지 먹을거리 중에서는 ‘원래의 모양과 향을 온전히 보존한 먹을거리(wholefood)’를 가장 먼저 꼽았다. “땅이 우리에게 준 상태로 먹어야 그 기운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만약 시금치라고 하면 그 형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걸 쓰는거죠. 생으로 먹으면 가장 좋고, 조리해서 먹더라도 원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상태로 먹는 것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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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은 매일 들른다는 한살림매장에서도 농산물 위주로 이용한다. “거의 한살림에서만 장을 보는데 애호박, 오이 등 채소 위주로 구매해요.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장을 보면 좋지만 한살림 채소는 금방 동나서 오전 11시만 돼도 없더라고요. 문 열자마자 들러서 장바구니에 담은 채소를 하루 종일 들고 다녀요. 하하.”

온전한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은 그것을 건넨 땅과, 이를 위해 수고한 생산자를 향한 감사로 이어졌다.
“좋은 먹을거리를 위해서는 땅이 좋아야 하는데 농약을 퍼붓다 보면 좋은 먹을거리를 찾을 수 없는 세상이 오지 않겠어요? 그러니 유기농으로 농사지어 땅을 살리는 농부가 제일 귀하고 감사하죠. 한살림도 그런 마음으로 이용해요. 미국에서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파머스마켓(farmer’s market)이 열려요. 누구든지 집에서 직접 기른 채소를 가져다 나와서 팔 수 있는 구조고 그걸로 먹고 사는 농부도 많죠.
한국에서는 그런 시스템이 별로 없다 보니 유통과정에서 농부들이 많이 피해를 본다고 알고 있어요. 한살림에서는 70% 이상을 농부에게 돌려준다고 해서 이거다 싶었어요. 내가 좋은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땅과 농부를 살린다는 면에서도 꼭 서포트를 해야 할 곳이라 생각했죠.”

먹을거리의 귀함을 알고 땅과 농부의 수고에 감사를 아끼지 않는, 그 같은 사람이 넘쳐난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더 풍성해질까. 한살림이 가야 할 길은 아직 많이 남았다.


글 김현준 편집부 / 사진 이승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