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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살림이야기

한살림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만들어갑니다

2018.11.0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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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전북 부안에 내려와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올여름에는 제 손으로 심고 가꾼 단호박을 거두어 처음으로 한살림에 공급했습니다. 며칠 전 베고 말린 나락도 출하를 앞두고 있습니다. 새내기 농부에게 가을은 바쁘고도 기쁜 계절입니다.
이십여 년을 실무자로 일하다가 적지 않은 나이에 농부로 새롭게 한살림하게 되었습니다. 난생처음 짓는 농사에도 부담이 덜한 것은 한살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콕 집어서 말하면 한살림이 지난 30년간 지켜온 ‘약정’ 정책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농사경험이나 규모에 관계없이 공평하게 약정량을 나누는 이 산들바다공동체 회원들 덕분입니다.
바른 가격을 위해 노력하는 한살림
한살림은 대량으로 만들고, 쓰고, 버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자본주의는 누군가가 시장이라는 이름의 황무지에 물품을 쏟아내면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주워가며 돈을 내려놓는 구조입니다. 서로가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고, 소비하는지 모른 채 살아갑니다. 필요에 의한 생산과 소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농산물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농업은 수요와 공급의 적정성을 잃어버렸고, 시장에서는 과잉과 부족이 반복되며 가격 결정 과정이 생산과 소비 주체의 손을 떠났습니다. 기후변화로 생산의 안정성이 떨어진 최근에는 더 심각해졌습니다. 품질과 가격을 잣대로 사고 팔릴 뿐 생산하는 이나 소비하는 이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살림은 농업의 이런 문제를 깨닫고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한살림이 직거래와 계획생산-책임소비, 약정이라는 원칙을 세우고 지켜가는 이유입니다.
해마다 씨 뿌리고 거두기를 반복하는 농민들에게는 어떤 작물을 얼마만큼 심고 가꾸는 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특정작물을 여느 해보다 많은 농민들이 심게 되면 시장가격이 폭락하기 일쑤입니다. 농산물의 가격이 생산비에 근거해서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수요와 공급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에 한살림은 생산자와 소비자라는 개별 경제주체 간의 이해와 요구, 필요를 파악하고 계획을 세워 생산하고 책임지고 소비하는 방식으로 문제점을 해결하려 했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물품을 조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적어도 1년 단위로 생산계획을 수립하고, 생산한 만큼은 책임소비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생산자는 자신의 경지면적과 노동력, 기술력을 고려해서 작물을 선택하고 경작면적도 정합니다. 작물과 면적이 정해지니 소득 또한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농사를 시작하기 전 약정이라는 방식을 통해 출하량과 가격을 미리 정하기 때문입니다. 농산물 가격은 생산비에 근거해 정해집니다. 생산자는 종자와 퇴비, 각종 농자재 비용, 임차료, 고용노동비 등에 자신의 노동력을 더한 기준으로 금액을 책정합니다.
최근에는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기대하는 수확량의 절반도 생산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집니다. 시장의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면 가격이 고정되어 있는 한살림물품 이용이 크게 줄어 물품이 적체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가격안정기금을 통해 공급가격을 조정해서라도 물품을 소비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계획에 의한 생산과 소비가 일치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생산자-소비자 함께하면 가능합니다
생산계획을 통해 물량과 가격을 약정하는 것은 생산자만을 위한 정책은 아닙니다. 도시 소비자에게는 안정적으로 한살림물품을 공급받을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생산자가 계획생산에 애쓰듯이 소비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소비의 책임을 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그것이 모여 한살림이라는 큰 그릇을 만듭니다. 계획생산-책임소비는 안전한 ‘밥상’의 확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도시와 농촌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씨앗이기도 합니다.
올해 처음으로 지어본 논농사 2,400평에서 벼 4.6톤을 거뒀습니다. 4월에 볍씨를 고르기 시작해서 6월에 모를 냈습니다. 7월에는 폭우에 논이 통째로 잠기기도 하고, 때로는 물이 귀해 남들이 잠든 한밤중에 물을 댄 적도 있습니다. 풀은 뽑아도 깎아도 계속 자랐습니다.
논농사는 큰 기계가 하는 작업이 많아 덜 번거롭기는 하지만 대신에 종자와 퇴비, 쟁기질, 이앙비, 수확비, 건조비까지 제하고 나면 손에 쥐어지는 돈이 500만 원이 채 안될 것입니다. 예닐곱달 동안 노심초사한 결과가 단지 그만큼이라면 헛헛하기 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느다란 모가 내 손길을 거쳐 통통하게 자라고 나락까지 맺힌 것이 마냥 뿌듯하고, 도시 조합원들이 고마운 마음으로 밥상에 둘러앉을 것을 알기 때문에 첫해 농사가 참 즐거웠습니다. 아마 내년에도 그러겠지요.

배영태 부안 산들바다공동체 생산자, 전 한살림연합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