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여 논밭에서 비닐을 태우는 일이 발생할까 염려했다. 그렇게 되면 비닐이 타면서 나오는 환경호르몬이 작물에 닿을 것이다. 그래서 아예 종량제 봉투를 농장에 비치했다. 조금이라도 비닐 쓰레기가 생기면 얼른 분리 수거했다. 술과 담배까지 끊어가며 평생 친환경 농업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어느날 국가가 승인한 ‘주키니 호박’ 종자를 사서 심었다가 유전자 조작 작물 재배 농가가 된 낯선 자신을 발견해야만 했다. 그가 그토록 돌보고 아낀 밭은 ‘위험 지역’이라는 팻말이 붙은 현실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기피인물로 취급되는 자신을 서러운 눈물 속에서 부딪혀야 했다. 모든 게 꿈이 아니었다. 차디찬 현실이었다. 농민은 국가를 믿었을 뿐이다.
유전자 오염 주키니 호박 종자가 외국에서 수입되어, 아무도 모른 채 오랫동안 농가에게 팔렸다. 영문도 모른 채 사람들은 그 호박이 들어간 반찬과 밥을 먹었다. 우리는 신뢰를 잃었다.
그러나 신뢰가 있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 나는 문제의 호박 종자를 수입한 종자회사가 ‘밀수’를 했다고 판단하지 않고 있다. 국내총생산 대비 세계 10위인 한국에서 버젓한 종자회사가 종자를 밀수하여 농가에 보급하는 모의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가 책임
밀수가 아니라 국가의 신고 수리와 승인을 받은 종자 수입일 것이다. 국가는 종자산업법과 종자관리요강이라는 법에 따라 수입 종자 시료를 제출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수입적응성 시험을 했을 것이다. 그 심사 기준의 하나로 이렇게 되어 있다. “국내 생태계보호 및 자원보존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없다고 판단되어야 한다.” 정보공개가 충분히 되지 않은 지금이지만, 국가는 유전자 오염 주키니 호박 종자를 정상적 종자로 판단하고 승인해 주었다고 본다. 국가는 유전자 오염을 밝히지도 못했고 종자 생산 판매 신고를 수리했다. 농민은 국가를 믿었다. 그러므로 국가는 농민에게 배상해야 한다. 농민이 잃은 신뢰를 조금이라도 그리고 남김없이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이어 생산자 농민을 신뢰한 한살림과 소비자 시민에게도 국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신뢰는 현대 정보화 사회에서 매우 핵심적인 가치이다. 유전자 오염 종자를 수입한 회사, 종자를 보급하여 유통시킨 회사가 제조물 책임을 지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유전자 오염 종자인 줄 모르고 수입했다는 항변은 허용되지 않는다.
유전자 오염없는 생태와 밥상
이런 질문에 이른다. 만일 유전자 조작 옥수수를 수입하듯이, 문제의 호박을 식약처의 이른바 ‘유전자재조합식품안전성 평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수입하면 상황이 마무리되는가?
한살림의 가치를 지키려면 더 밀려서는 안 된다. 생태에서는 유전자 오염이 있으면 안 되지만, 유전자 오염된 밥상은 괜찮은 모순은 이제 어느날 갑자기 한살림의 가치를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로 깊다. 유전자 오염이 없는 생태라는 틀을 밥상에도 적용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생태와 밥상은 다르지 않다.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유전자 오염 없는 밥상을 선택할 권리를 넘어서 보자. 생태에 적용하는 관점을 밥상에도 유지하자고 다시 목소리를 내자. 이번 호박 생산자 농민에게 신속한 도움을 한살림이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글을 맺는다.
글. 송기호 변호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환경보건위원회,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