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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살림이야기

이 땅의 다양한 밀들

2023.08.2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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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햇밀장에 전시된 다양한 밀
코로나 직전 한살림 연구지원프로그램 덕분에 영국 콘웰지역의 Gotheleny Farm이라는 농가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재생유기농업을 실천하고 있는 이 농가가 다양한 풀을 기르고 돼지를 방목하면서 최종적으로 얻으려는 것은 바로 밀이다.  

끝없이 펼쳐진 들녁에는  젊은 농부 Fred가 기르는 ‘April Beard 4월의 수염’이라는 밀이 수확을 앞두고 있었다. 비료 사용을 하지 않고도 안정적인 수확을 얻기 위해 선택한 오래된 품종밀이다. 농부는 씨드뱅크에서 5g의 밀씨를 구해서 씨앗을 불리고 수만평 밀밭의 80%에 이 밀을 심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다양한 20%는 다양한 밀들을 심는다고 했다. 기후위기에 대한 나름의 대비책이다. 

‘4월의 수염’같은 밀들이 이땅에도 존재한다. 하동 악양에서 작은 출판사를 하는 농가 봄이네는 마을의 할머니들이 이어가는 뻘건밀 씨앗을 이어간다. 소신대로 무투입 자연농법을 선택한 이들에게 이모작으로 가장 안정적인 수확을 내어주는 밀은 동네 할머니의 씨앗이었다. 이 뻘건밀의 극강의 구수한 맛을 가장 먼저 알아본 이들은 네팔에서 온 이주여성들이다. 지금도 봄이네는 이 밀을 이어간다. 모든 밀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를 필요는 없으니까.  

봄이네가 이어가는 이 밀은 사실 품종을 알 수 없다. 우리 땅에서 이어져온 밀의 유전자원 분석은 최근에야 시작되었기에 앉은키밀 또는 그와 유사한 밀일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이땅 곳곳에는 이렇게 토종,  토박이 씨앗들이 이어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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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열린 5번째 햇밀장에서
그중 앉은키밀은 일찍이 유명세를 탄 씨앗이다. 진주 금곡장미소를 중심으로 지역의 농부들이 이어간 씨앗은 우리의 대표적인 토종밀로 자리를 잡았다. 사실 이 밀의 유전자원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을 거쳐 세계로 퍼져나갔다. 키가 작아 쓰러짐이 적은 씨앗의 유전자를 가진 밀은 북미 평원을 가득 채우던 터키하드레드 같은 키 큰 밀을 밀어내고  1960년대 녹색혁명의 주인공으로 그 평원의 주인공이 되었다. 

앉은키밀의 유명세 뒤에 가려진 수없이 많은 밀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고창의 김남수 농부의 밭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남도참밀이 자랐다. 이 밀은 장흥의 이영동 농부가 어머니께 물려받은 씨앗이다. 누룩밀이라고도 불렸던 이 밀은 올해 익산에 자리잡은 빵집 그라운드에서 빵으로 만날 수 있다. 밀이 익을무렵 밀밭을 다녀온 베이커와 인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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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빵이라도 밀 종류에 따라 색과 맛이 다르다
양평에서 지난 2019년 찾아진 밀씨가 있다. 할머니가 이어가시던 밀은 추운 양평의 겨울을 너끈히 나는 씨앗이었다. 사람들은 이 밀에 양평참밀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씨앗을 불려 나가고 있다. 지난해 마르쉐 햇밀장을 준비하면서 지역의 작은빵집 쉐즈롤은 이 밀로 화덕빵을 구웠다. 씨앗으로 지역과 지역 사람들의 삶이 풍부해지는 장면이었다. 

농부 중에는 이런 다양한 참밀 재배에 힘을 쏟는 농부들도 있다. 의성의 이철규 농부는 자신이 이어가는 검정밀, 백강밀 이외에도 경기, 봉화, 남도참밀 등을 기르면서 이땅의 다양한 밀 맛을 이어가고 있다. 

꼭 이런 토종밀이 아니어도 이땅에서 오랫동안 길러져 온 밀들이 있다. 1997년도부터 보급된 금강밀이 대표적이다. 면용으로 개발되었으나 빵을 만드는 데도  두루 쓰이는 금강밀은 구수한 풍미로 국산밀의 대표적인 품종으로 자리잡았다. 국산밀 빵이 어렵다고 하지만 베이커들의 베이커 월인정원님이나 청주 라요파스토 나하나 요리사는 매년 구례 홍순영 농가의 금강밀을 베이스로 자신만의 빵을 굽는 일을 수년간 계속 해 가고 있다.

2000년대 제빵성이 강화된 백강밀이 개발되어 현재 빵용밀을 대표하고 있다. 재배지가 점점 넓어져서 올해는 DMZ 대성동마을부터 저 남쪽 사천 성한농장까지 곳곳에서 백강밀이 생산되고 있다. 배유부분이 많은 백강밀은 특유의 단백질 구성으로 제빵성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성한농장의 백강밀은 국가대표급 한식, 양식당에서 면의 재료로 사랑받고 있다. 
최근에 국립식량과학원은 배유가 풍부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국산밀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황금알과 안토시아닌 성분을 함유하여 영양적으로 우수한 아리흑밀을 개발하여 보급하고 있다. 이런 육종은 국산밀의 산업적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평화나무농장이나 홍성의 장구지 선생님이 이어가시는 딩켈(스펠트)밀도 장흥의 농가빵집 그랑께롱이 이어가는 스위스밀도 해를 거듭하면서 이땅에서 심겨지고 있다. 모두 귀한 이땅의 씨앗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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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같은 밀이지만 품종에 따라 조금씩 모습이 다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지구열화의 시대이다. 아무도 살아 본 적 없는 기후위기라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은 씨앗들과 가깝게 살아야 한다. 이런 씨앗이 사라지지 않도록 이땅의 다양한 밀을 길러가는 농부들이 있고 그 밀을 계속 사용하는 요리사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이땅의 밀들이 이어져가도록 소비자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글 이보은 마르쉐친구들
*‘마르쉐@’는 ‘장터, 시장’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마르쉐(marché)에 장소 앞에 붙는 전치사 at(@)을 더해 지은 이름으로, 어디에서든 열릴 수 있는 시장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2012년 10월 첫 장을 연 마르쉐는 ‘사람, 관계, 대화가 있는 시장’이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